[러시아 문학] 불가코프의 「질주」에 나타난 꿈과 경계

불멸, 그것은 고요하고 빛으로 가득한 기슭
우리의 길은 그곳을 향한 열망.
질주를 마친 자, 편안히 쉴지어다!
─쥬코프스키

책세상에서 출판된 『조야의 아파트·질주』(김혜란 옮김).

<책 소개>

반혁명적, 반소비에트적 작가로 인식되면서, 생전에 많은 작품을 발표할 수 없었던 미하일 불가코프의 희곡 2점을 수록한 책. 「조야의 아파트」는 네프 시기의 소비에트 사태를 다룬 작품으로, 희망과 절망, 삶과 괴저가 뒤얽혀 있는 부조리하고 그로테스크한 환영을 보는 듯한 당시의 삶을 담았다. 「질주」는 '가장 불가코프적인' 희곡으로 평가받은 작품이다. 내전 막바지에 터키로 망명했다가 러시아로 돌아온 백위군 육군 중장을 모델로 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용서나 화해의 문제보다는 주인공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기까지의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불가코프의 희곡 「질주」는 ‘여덟 편의 꿈’이라는 부제에 맞춰 각 두 편의 꿈이 하나의 막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꿈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데, 내전을 맞아 갑작스럽게 남편을 찾아 떠내게 된 세라피마와 우연히 그녀와 동행하게 된 골룹코프의 이야기가 핵심 서사이다.


누가 꾸는 꿈인가?

꿈은 내러티브이기 이전에 하나의 현상이다. 수면 중 발생하는 현상으로서 꿈은 그렇기에 꿈을 꾸는 주체와 수면(혹은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이 필수적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작품 내에서 꿈을 꾸는 주체에 대한 언급은 매우 간접적으로만 제시된다. 작품의 시점은 일반적으로 희곡이 그렇듯 관찰자적 시점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무대지시 부분에서는 확실히 전지적 시점이 나타난다. 따라서 작품 내 인물이 꾸는 꿈으로 여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꿈의 주체는 자연스럽게 작가, 혹은 내포작가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꿈이라는 형식이 주는 효과와 동시에 작가(내포작가가 아닌)가 왜 꿈이라는 형식을 선택하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왜 꿈인가?

각 장들은 꿈의 주체가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것은 꿈이고, 그 꿈이 어떠하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이야기의 진행은 현실에서 명확히 유리된다. 작중 등장인물 역시 자신들이 겪게 되는 고난과 관련해 이것이 꿈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여러 번 제기한다. 즉, 꿈이라는 요소를 통해 서사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작가 불가코프의 전기를 생각해봤을 때 백위군 인사를 다수 등장시켜 핵심 인물로까지 내세운 것에 대한 면피용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미하일 불가코프(1891~1940)의 초상.
오늘날에야 여러 작품들이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며 러시아의 국민 작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생전의 불가코프는 대부분의 작품이 출판·공연을 금지당한 비운의 작가였다.

그러나 동시에 꿈은 서사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작품 초반부 내전에 대한 묘사와 백위군 병사들이 후퇴하며 겪는 갈등은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으로 제시된다. 이는 서사의 양식으로서 꿈이 단순한 비현실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꿈이라는 형태를 통해 작품의 외적 진행, 즉 세라피마와 골룹코프의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가 꿈을 꾸는 상황 자체는 굉장한 개연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품의 내적 진행은 환상과 현실이 ‘두 개의 몸을 가진 하나의 세계’로 뒤엉켜 공존함으로써 불가코프적 그로테스크를 구성하고 있다.


경계 위의 사람들

작품 내에서는 다양한 경계가 발견된다. 갑작스럽게 삶에서 고난으로 끌려온 세라피마와 글룹코프, 대주교이자 화학자인 아프리카누스-마흐로프, 바퀴벌레 황제인 아바투르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경계를 떠돈다. 이들을 하나로 엮는 내러티브 역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떠돌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을 경계로 내몬 것은 백위군과 적위군의 경계이자, 동시에 역사의 경계인 내전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백위군의 지휘관으로 실제 내전을 수행한 자이며, 그렇기에 그 경계 속에서 분열되어버린 흘류도프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내몰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질주하고 있다. 마치 멈추면 넘어지는 외발자전거처럼 말이다. 경계 속을 떠돌던 세라피마와 골룹코프는 결국에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기로 한다. 차르노타는 콘스탄티노플에 남기로 한다. 그 자체가 경계가 되어버린 흘류도프는 러시아로 돌아가기를 꿈꾸지만, 결국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내전이라는 역사의 경계에서 각기 다른 경계를 지나오며 ‘질주’해야만 했던 이들에게 작가는 이렇듯 조그맣게나마 ‘평온’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2009년 '막심 고리키 극장'에서 진행된 세르게이 코발치크 감독의 「질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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