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중국의 교류 - 백제 유물에서 발견되는 중국의 흔적들 역사

  백제 유적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고대 왕릉으로서는 극히 드물게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은 동시에 무덤의 양식이 중국 남조의 것을 따랐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당시 백제는 왕의 무덤조차 다른 나라의 양식을 따를 수 있을 정도로 이미 남조의 문화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렇듯 백제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준 중국과 백제의 교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백제 유물에서 발견되는 중국의 흔적을 찾아볼 것이다.

<그림 1> 무령왕릉 현실
무령왕릉은 당시 중국 남조 양나라 지배계층의 무덤 양식인 벽돌무덤을 모방한 것으로, 고대 무덤으로서는 극히 드물게 주인이 밝혀져 있다.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한성시대 백제와 중국의 교류

  백제와 중국 왕조의 외교는 372년 근초고왕이 중국의 남조 왕조 중 하나였던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내면서 처음으로 이루어진다. 근초고왕 시대는 백제가 고대국가로서 면모를 완비한 시기로, 건국 이래 영토의 팽창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 진 시기였다. 북쪽으로 진출을 감행하여 이를 저지하려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마한 지역의 복속 및 가야 지역의 지배층과도 상하관계를 맺어 옛 마한과 가야 지역에 대한 영향력도 확보하였다. 또한 왜국과도 정식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한편 중국의 동진과도 정식적인 외교관계 수립하는데 이는 발전한 백제의 자신감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동진과의 교류에서 시작된 백제의 대 중국 관계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한성 함락으로 인한 웅진 천도 시기까지 모두 29회 걸쳐 사신을 파견하거나 받아들이는 형태로 지속되었다. 이중 동진과의 교섭은 모두 8회가 실시되었으며, 동진이 멸망한 이후에 성립한 남조의 왕조인 송(宋)과의 관계가 모두 18회이다. 이외 남조와는 대립관계에 있던 북조의 북위(北魏)와의 교섭도 3회 정도가 확인된다. 특히 북위와의 교섭은 그 동안 백제가 한 번도 북조 정권과 외교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그 목적은 개로왕이 북위 왕조에 보낸 국서에 잘 나타나듯이 북위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북위는 백제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이에 백제는 곧장 북위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이러한 백제의 태도는 대 중국 관계에 임하는 백제의 기본 인식 과 운용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림 2> 5세기 동아시아 정세
출처: KBS 역사스페셜

  한편 백제의 이례적인 대 북위 외교는 곧장 고구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결과 475년 한성 함락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한성의 함락에 따른 백제의 한강 유역 상실은 그동안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소위 한성시대의 종식을 의미한다. 이후 백제는 도읍을 금강유역인 웅진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백제의 대 중국 관계는 웅진과 사비시대에 들어와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웅진시대 백제와 중국의 교류

  웅진시대(475~538)의 대 중국 관계는 476년 송나라와 외교의 개시를 시작으로 534년 양나라와의 외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21회가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고구려의 압박은 백제의 대 중국 외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웅진 천도(참조: 백제는 왜 하필 웅진을 선택하였는가?) 직후인 476년 문주왕이 파견한 대 중국의 사신단이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가려고 하였지만 고구려의 방해로 인하여 되돌아왔으며 또한 동성왕 때도 유사한 경우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웅진시대 초기의 혼란은 동성왕이 즉위한 이후에 차츰 진정되어 갔으며 특히 무령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본격적인 재도약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것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무령왕은 521년에 중국의 남조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여기서 백제는 그동안 여러 번 고구려를 격파하며 바야흐로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중국 조정에 선언한다. 이렇듯 웅진시대 초기의 사회,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대 중국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국가 중흥에 그만큼 중국과의 교류 필요성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비시대 백제와 중국의 교류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서기 538년에 웅진을 뒤로하고 수도를 사비(부여)로 옮기게 된다. 성왕은 국호도 남부여(南夫餘)로 바꾸는 등 백제 중흥의 의욕에 찬 사비시대를 열었다. 나아가 541년에 중국의 양나라에 조공하면서 양나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전과 선진문물을 제공받아 백제 문화의 발전을 도모한다. 당시 백제는 바다 건너 왜에 오경박사를 비롯한 지식인과 많은 선진문물을 보내주고 있었는데, 백제가 양의 문물을 수입하여 자기 것으로 소화한 다음에 다시 왜에 전수한 것은 외교관계를 매개로 한 물류의 유통이 양·백제·왜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554년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한 대 중국 외교를 전개하였다. 위덕왕 시대의 대 중국 외교는 특히 567년 이후 진(陳)과 북제(北齊)에 대한 동시 조공외교를 개시한 이후에는 남조와 북조 모두를 염두에 둔 외교를 행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과거와 달리 양측 모두에게 사절을 보내어 외교 관계를 모색한 이유에 대해서는 신라의 한강 유역 영유에서 비롯된 한반도 삼국 관계의 변화를 기축으로 당시 백제로서는 나제동맹의 결렬에 따라 이제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할 새로운 동반자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백제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에게 고구려에 대한 협공을 제의하였다는 점을 보면 위와 같은 설명은 타당성을 지닌다. 고구려를 견제하는 방법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중국 왕조를 이용하는 것은 언제나 유효한 방법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제의 북조 접근을 오로지 백제와 고구려 사이의 문제에서만 설명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대 중국 외교를 위한 지리적 교두보를 확보한 신라의 동향도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 3> 6세기 삼국의 영토
출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실제 신라는 백제보다 3년 앞서 654년(진흥왕 25년)에 이미 북조의 북제(北齊)에 조공 외교를 전개하고 이듬해 봄에는 북제로부터 정식 책봉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남조 진(陳)의 사자가 신라를 방문하는 것을 기회로 이후 진흥왕 32년까지 거의 매년 진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는 등 남조와 북조를 겨냥한 신라의 대 중국 접근은 활기를 띤다. 이러한 신라의 움직임을 염두에 둔다면, 한강 유역을 상실한 이후 신라와 대립할 수밖에 없는 백제로서는 신라와 외교적으로 경쟁하기 위해서 남조와 북조를 동시에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또한 거시적으로는 581년 수나라의 건국 이후 남북조 분열 시대가 종식되어 갔다는 점에서 변동기의 대륙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위와 같은 대 중국 접근을 생각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백제 유물에서 찾을 수 있는 중국의 흔적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 중국에서 건축물에 벽돌을 사용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나, 무덤을 축조하는데 사용한 것은 한나라 이후 왕 또는 상류층의 무덤 축조에서부터라고 한다. 이는 남조대에 이르어 크게 유행하는데 당시 활발한 국제교류를 통해 각지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벽돌무덤은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으로 웅진시기 공주지역에만 있다. 그 중 무령왕릉 출토 벽돌과 남조의 벽돌은 그 형태가 같고, 글자와 무늬를 새긴 부위도 거의 일치하며, 글자의 내용과 무늬 등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는 남조 벽돌이 백제 벽돌의 조형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령왕릉 묘지석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券): 매지권이란 일종의 묘지 매매계약서로서, 땅의 신에게 묘소에 쓸 땅을 매입함으로써 누구도 땅을 침범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자 신에게 묘와 유체의 안호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는 고대 중국으로부터 시작된 장례 풍속으로서 도교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그림 4> 국보 제163호 무령왕릉 지석

계수호(鷄首壺): 계수호란 주둥이 부분이 넓은 단지에 닭 머리 모양의 주구와 손잡이를 붙인 형태로 '천계형주자', 혹은 '천계호'라고도 불린다. 중국에서는 동서진 시기부터 남조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한 것으로, 국내에서 출토되는 계수호 대부분이 중국 동진에서 제작되어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그림 5>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계수호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의 수호신 석수(진묘수): 진묘수란 무덤 안이나 앞에 놓인 기괴한 신수를 표현한 공상적인 동물로서, 악을 쫓고 사자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져 왔다. 이는 중국의 묘장풍습에서 기원한 것으로, 전국시대 초나라 무덤에서 나무 조각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한대에 이르러서는 무덤 앞에 기괴한 돌짐승을 세우거나 짐승모양을 무덤 안에 넣는 모습으로 보편화된다.

<그림 6> 국보 제162호 석수
출처: 국립공주박물관 홈페이지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 새겨진 북조 서체의 명문: 사리감이란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형태의 사리감일 뿐만 아니라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사리 공양자가 분명히 남아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 사리함의 명문은 북조의 서체로서, 이는 백제가 북조와도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증명한다.

<그림 7> 국보 제288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
출처: 국립부여박물관 홈페이지

사택지적비의 사륙병례체와 구양순체: 사택지적비는 백제 의자왕 때 활약한 대신 사택지적이 남긴 비석으로, 말년에 이르러 인생의 허무함을 한탄하며 만든 것이다. 비문의 문체는 육조시대의 사륙변려체, 글씨체는 당나라의 구양순체로 당시 백제 귀족 문화에 있어 중국의 영향을 가늠케 한다.

<그림 8> 충남유형문화재 제101호 사택지적비
출처: 국립부여박물관 홈페이지

호자(虎子): 호자란 호랑이 등의 동물 모양으로 만든 용기로서, 주로 변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개성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청자호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보인다. 부여 군수리 출토 호자는 중국 호자의 모양을 변화시킨 것으로, 이는 당시 백제가 국제적인 교류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다시 변화·발전시킴으로써 백제만의 문화를 만들어갔음을 보여준다.

<그림 9>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호자
출처: 국립부여박물관


<참고자료>

국립공주박물관 홍보책자
국립공주박물관 홈페이지 http://gongju.museum.go.kr
국립부여박물관 홍보책자
국립부여박물관 홈페이지 http://buyeo.museum.go.kr
국사편찬위원회·국정도서편찬위원회, 2006, 『고등학교 국사』 제2판, 두산동아.
신형식, 2005, 『백제의 대외관계』, 주류성.
이남석, 2007, 『百濟文化의 理解』, 서경문화사.
이형구, 2004, 『백제의 도성』, 주류성.
최형철, 2007, 『박물관 속의 한국사』, 휴머니스트.
한국문화유산답사회, 2002, 『답사여행의 길잡이-충남』,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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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零丁洋 2012/10/27 22:39 #

    남조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고구려가 필요한데 고구려가 아닌 백제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요? 역시 북위는 배후 고구려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는 백제가 필요한데 백제는 북위의 제안을 거절하면서도 고구려와 대립하는 아이러니는 뭔가요?
  • 김고기 2012/10/27 23:37 #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북위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이걸 속국 관계로 파악하기보단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서 성립된 형식적 군신관계로 파악하는 게 옳습니다. 실제로 북위가 고구려에게 혼인을 제안한 적도 있고, 남조 사신 다음으로 고구려 사신을 최고로 예우했다는 기록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양국은 실제로는 모를지라도-고구려도 북위도 서로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이 몇 번 있었습니다- 형식적으로나마 평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외교란 게 겉 다르고 속 다른 미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북조로선 한반도의 고구려나 백제나 다 변방 오랑캐일 뿐 역시 최대의 상대는 서로였기에, 북위는 고구려 침략에 상대적으로 큰 의지를 보이지 않았던 걸로 추정됩니다. 동시에 남조가 건재한 상황에서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이는 모험을 할 필요가 없었겠죠. 고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쪽에 백제와 신라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국력상 우위인 북위와 부딪치는 건 부담이었겠죠. 남조가 고구려에게 제안을 여러 번 했음에도 결국 백제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파악됩니다. 동시에 북위가 백제의 제안을 거절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겠지요. 송을 상대하기도 급한데 괜히 백제와 협력했다가 고구려 꼬이기라도 한다면... 이렇듯 북위와 고구려의 대립은 조금 더 입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국제정세는 이후 고구려가 한반도 남침을 개시할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 零丁洋 2012/10/28 01:00 #

    지리적으로 보아 너무 모호한 외교라 전부터이해가 않됐습니다. 만약 백제가 북위와 고구려의 사이에 있다면 온당해지는 외교관계죠.
  • 부여 2012/10/28 08:32 #

    그렇다고 들고 나오는 게 고작 유통기한 지난 요서경략설... -_- 이건 뭐 "좋은 답변이군요. 하지만 읽지는 않았습니다"인가요? 실망이네요.
  • 대신라혼 2013/02/20 04:57 # 삭제

    훗. 재미있게도 중국 남조의 유물이 지독하게 출현하는 서해안 지역의 유전자 검출 현황은 중국인 유전자인 O3 M117,M134인데, 유물 역시도 그렇게 나오는군요. 백제무령왕릉에서 출토가 된 매지석에서 사마왕이라는 문구가 출현해서 난리가 났다죠? 왜냐하면 사마씨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거든요. 사마씨는 중국 동진 왕가의 성씨이죠. 그리고 백제와 倭는 4세기부터 둘다 중국 남조의 유물을 출현을 시키는 공통점 역시도 가지고 있고요.

    중국동진이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같이 공략을 했다고 보는게 정확할텐데, 백제사 전공자들의 역사왜곡 수준이 정점을 찍고 있군요. 삼한 신라 민족이 아니었으면 한국은 중국 한족에 의해 멸망당하고 중국의 하나가 될 뻔 했겠습니다.
  • 대신라혼 2013/02/20 05:03 # 삭제

    북위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인데, 고구려는 선비족의 유물을 출현시키는 공통점이 있죠. 그리고 고구려의 주류 인종 역시도 선비족이기도 했고요. 풍씨가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풍씨 이외에도 수당 전쟁 수훈갑인 울지문덕이 또한 선비족이기도 하죠. 선비족이 없으면 나라가 만들어지지 못하는 나라가 고구려이기도 하죠. 그래서 고구려 유물의 대부분은 선비족인 것으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북위가 왜 고구려를 공격을 못했느냐? 뭐 어렵습니까? 동족인데 어떻게 때리느냐 말이죠. 그럼 백제는 왜 북위로 하여 고구려를 치게 했느냐? 동족상잔을 일으켜보겠다는 의도지,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왜 이렇게 낭만적인 역사분석을 시도하는 분들이 많을까요. 이래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더욱 진실된 역사일 수 밖에 없는거죠.
  • dawei0406 2013/10/02 08:01 # 삭제

    북위 탁발씨는 4세기 후반 백제,신라,왜를 정복한 모용씨의 모국 북연을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입니다. 모용씨 백제(곤지,문주,동성왕 계)가 북위와 사이가 좋을 리 없죠. 백제는 개로왕이라는 허수아비 왕을 앞세워 북위와 고구려를 이간질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강국 고구려를 피해 북위를 직접 공격하여 중국 동부지역을 장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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