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러시아사] I. 근대 러시아의 탄생: 표트르 대제 역사

  I. 근대 러시아의 탄생

  1. 표트르 대제 이전의 러시아
<그림1> 근대 철학의 아버지 르네 데카르트
Frans Hals, 1649~1700년 경, <Portrait du philosophe René Descartes>, 캔버스에 유채, 77.5×68.5cm, 루브르 박물관.
세계사에서 러시아가 가지는 의미는 게르만 왕국에 미치지 못한다.
-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17세기 초의 러시아는 이미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넓은 국가였지만, 하나의 폐쇄된 국가에 불과했다. 러시아는 내륙 국가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북극해와 태평양은 혹한 때문에 항해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고, 발트 해로 향하는 길목에는 스웨덴이, 흑해로 향하는 길목에는 투르크가 버티고 있었다. 러시아와 유럽이 연결되는 길을 직접적으로 차단해버린 이 두 나라는 걸핏하면 러시아를 침략해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유럽에서 러시아에 대한 가장 광범위한 인식은 미개하고 낙후된 야만 국가라는 것이었다. 사실 실제 러시아의 모습도 이러한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축물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비가 오면 길이 진흙으로 변해 고립되길 일쑤였다. 귀족들 중에서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사람이 드물었으니 평민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수도 모스크바에서조차 글을 아는 사람이 100명 중 3명이 채 되지 않았다.

  특히 민중들의 생활은 더없이 참혹했는데, 러시아 국민의 90%[1]를 차지하는 농노들의 생활은 매우 궁핍해 힘든 노동에도 불구하고 하루 한 끼조차 먹기 힘든 상황이었다. 절반이 넘는 아이들은 한 살을 채 넘기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으며 40세까지 목숨을 연명한 이들은 대단한 행운아로 여겨질 정도였다.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도 매우 후진적이어서, 국가의 운영과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주요 기술은 외국의 기술자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군함의 지휘관까지도 외국에서 초청해 왔는데,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배반을 하거나 적에게 투항해 버리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이후 ‘대제’란 칭호를 얻는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년)다.

[1] 러시아의 인구 관련 통계는 그 영토의 광범위성과 잦은 영토의 변동, 다양한 민족적 구성으로 인해 학자에 따라 지극히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는 주로 『러시아의 역사 하』(Nicholas V. Riasanovsky·Mark D. Steinberg, 2011)의 수치를 따른다.


  2. 표트르 대제의 유럽화 정책

  17세기 러시아의 대외 정책은 매우 폐쇄적인 것으로서, 무엇보다 자국민들이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힘썼다. 당시 러시아의 대도시 근처에는 외국인 마을이 있고는 하였는데, 이는 자국민들이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조처였다.[2] 이러한 상황에서 제위에 오른 표트르는 당시 국민들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행동을 감행하는데, 바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3] 그는 러시아의 낙후 원인이 지리적·정신적·문화적 폐쇄성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림 2> 근대 러시아의 토대를 완성하고 이후 '대제'의 칭호를 받는 표트르 1세
Paul Delaroche, 1838, <Peter I of Russia>, 캔버스에 유채.
유럽의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배운 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 표트르 1세(Peter I, Пётр I, 1972~1725)
  표트르가 유럽으로 떠난 것은 18세기를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당시 유럽은 이미 스페인이 저물고 네덜란드의 해양패권이 빛나던 시기였다. 영국은 입헌 군주제를 완성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전제 군주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제가 아닌 일반인 신분으로 유럽에 유학한 표트르는 공장에서 일을 하며 유럽이 항해 기술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러시아로 돌아온 표트르는 대대적인 개혁 작업을 벌여 러시아 체제를 처음부터 새로이 정비한다. 개혁이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부분은 군사기술을 비롯한 조선기술과 해양기술로서, 이는 발트 함대를 구축하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의 의도가 한껏 반영된 것이었다. 혁명을 향한 여정에서 이 시기가 가지는 의미는 굉장히 많은 공장이 건설됨으로써 매뉴팩처의 토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수공업 공장은 눈 깜짝할 새에 240여 개로 늘어났으며, 그동안 수입에만 의존하던 철 역시 1725년에는 해외로 수출을 하게 됐다. 이로써 1680년에는 150만 루블 정도였던 국가 수입이 1725년에는 900만 루블까지 증대됐다. 중공업, 제철, 제련, 광산업과 관련된 수많은 공장이 들어섰으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는 조선소가 건설되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 가야할 점은, 이러한 공장들이 건설된 목적이 군사상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러시아는 명실상부한 유럽 국가로서 입지를 다진다. 스웨덴으로부터 획득한 땅에 새워진 새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중심이 유럽으로 옮겨갔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개혁 정책 중 여기서 확인하고 갈 점은 그 개혁의 결과물이 평민 계층에게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는 것이다. 농노에 대한 착취와 전제 군주제는 더욱 강화되어 제국으로서 입지를 갖춘다. 한편 이 시기 러시아는 주변 상업 대국들과 정기적인 교역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유럽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4]
<그림 3> 러시아의 국민 시인 알렉산드르 푸슈킨
Vasily Tropinin, 1827, <Portrait of Aleksandr Pushkin>, 캔버스에 유채, 푸슈킨 박물관.
표트르 대제가 유럽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노라.
- 푸슈킨(Aleksandr Pushkin, Александр Пушкин, 1799~1837)
[2] 이러한 정책이 효과가 있었는지 러시아 국민들은 외국인을 매우 두려워하고 배척하였는데, 외국인이 방문한 마을에서는 집안의 창문을 모두 열어 환기를 시킨 다음 신부를 모셔와 다시 세례를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3] 러시아에서 황제는 인간이 아닌 신이었다. 러시아 민중들은 표트르의 유럽행에 몹시 경악했으며, 심지어 황제가 유럽으로 떠난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4] 앞서 러시아가 내륙 국가라는 점을 강조했다. 대 스웨덴 전쟁의 가장 큰 목적은 바다로 진출하기 위한 항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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