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열차는 자본주의인가? 영화와 드라마

  백여 년 전 영화가 발명된 이래 문학과 영화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누구는 영화로 인해 문학이 고사되어 간다며 영화의 시대를 문학의 위기로 규정했고, 다른 누군가는 영화를 문학을 향유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봤다. 어느 입장을 택하더라도 연극에서부터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이야기하기'를 가진 모든 매체는 '문학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개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비유'이다. 문학에 비해 이미지를 바로 전달하는 영화에서는 비유의 사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많은 경우 그 비유를 해석하지 않더라도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거나 작품을 즐기는 데 전혀 문제가 없도록 구성된다. 일단 인식된 이미지를 다시 해석하는 것은 어쩌면 귀찮고도 불필요한 작업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르코프스키 등의 은유적 영화가 어떤 사람에겐 지겹고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굳이 비유를 해석하지 않고 전해지는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졌다. 엄밀하게 현실성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면, 빙하기가 찾아온 가까운 미래를 그린 SF 영화에서 그쳐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물론 고도의 상상력이 요구되는 SF의 장르적 특성상 SF가 SF에서 그치는 경우는 나로선 본 적조차 없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기엔 역시 아쉽다. 작품 곳곳을 근사한, 때로는 노골적인 은유와 환유가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비유를 해석하면서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임에 분명하다.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간 지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이러한 비유 체계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접근은 거의 모두 제시된 듯하다. 여러 해석 중 유난히 자주 발견되는 해석은 열차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은유로 접근하는 것이다. 많은 감상들이 여기서부터 출발해 작품에 제시된 여러 상징들을 해석하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열차를 자본주의로 해석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적절한 여지가 있으나, 그것 이상의 한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1. 열차의 비유

  열차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열차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열차가 출발하게 된 이유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열차는 종말과 함께 방주가 되었고, 그 종말은 온난화로 시작되었다. 사실상 열차가 방주가 된 환경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최후라는 것이 프롤로그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셈이다.(이는 오늘날 반자본주의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적록연대의 주장, 즉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으로 인해 환경이 급격하게 파괴되고 있으며, 이를 멈추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그 열차가 비유하는 것은 무엇일까?

  열차가 무엇인지 추론할 수 있는 요소는 작품 속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열차의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열차 속 계급은 어떻게 정해지고 재생산되는지는 그저 약간의 힌트를 가지고 상상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것을 무언가에 굳이 끼워 맞추거나, 제시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공백으로 둔 채 접근할 필요가 있다.


  2. 꼬리 칸 사람들은 누구인가?

  열차를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로 본 사람들은 꼬리 칸 사람들에게서 쉬이 노동자 계급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꼬리 칸 사람들이 노동자 계급임을 추론할 수 있는 부분 역시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혹자들은 이 부분에 실망을 표시한다. 열차가 자본주의인 만큼 혁명을 표현하기 위해 계급을 좀 더 전면에 드러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 과정을 거치며 영화 속 혁명은 계급 없는 혁명, 혹은 혁명이 없는 폭동으로서 때로는 비판의 대상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 전제를 지우고 공백은 공백으로 둔 채 보자면, 꼬리 칸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체제 자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열차 내의 재생산 양식에 포함되고 싶어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착취 과정에 포함되고 싶어도 그럴 수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차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 의의를 모른다. 이들에 접근할 수 있는 단서는 이렇듯 단순히 극빈층이나, 착취당하는 사람이라는 접근이 아니라, 바로 여기 '소외'에 있다.

  꼬리 칸 사람들이 받는 차별과 생산 양식의 연관성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열차를 감싸고 있는 억압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관계가 아닌 카스트 제도를 떠올리게 한다. 신분에 따라 하는 일과 사회적 위치가 결정되고, 사실상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디스트릭트 9>에서의 차별을 떠올리게 한다. 굳이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덧대지 않아도, 우리는 외계인들이 왜 차별받고 억압받는지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꼬리 칸 사람들은, 꼬리 칸 사람이기에 차별받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 이유는 금방 제시된다. 그들은 열차가 예상하지 않았던 무임승차자이다. 윌포드의 체계에서 그들은 불청객이고, 존재하지 않아야 했던 사람들이다. 초기에 윌포드는 그들을 방치하지만, 큰 사건 이후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점이 지나자 그들의 용도를 찾게, 혹은 만들게 된다.

  열차 속에서 노동은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과수원에서 메이슨에게 인사를 건네는 농부나, 초밥을 쥐는 요리사, 열차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기관사 등이 스치듯 나타난다. 작품 내에서 제시되는 노동자는 이것이 전부이며, 이들이 열차 내에서 어떠한 계급적 관계를 갖는지, 열차의 체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역시 공백이다. 이는 표현의 부족으로 볼 수 있겠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혹은 필요하지 않다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꼬리 칸 사람들을 굳이 현실로 끌어오자면 그들은 '주변 계급'이다. 남미와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에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으며, 오늘날 한국에서도 늘어나기 시작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 편입되고 싶어도 아예 배제된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착취당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다. 착취당할 기회조차 없기에 더 가난하다. 그들이 체제에 포함되는 것은 <슬럼독 밀리어네어>나 작중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천운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노예나 노동자처럼 체제에 기여하지 않는다. 또 못 한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물론 있으면 언젠가 쓸 데가 있을 수도 있다. 체제를 유지하는 미담으로서, 혹은 극단적인 작업, 아동노동으로 비유된, 위험한 일을 싼 값에 처리하는 역할로서 말이다.

  생산 양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그들의 연명은 체제의 시혜로서 이루어지는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제3세계로의 지원이 해당 지역의 자생적 생산 능력을 이끌지 못하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바퀴벌레라는 극단적 대상으로 표현되었지만, 현실에서도 이들 지역으로의 지원은 주로 체제에서 버려진 물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물론 이는 현상의 기술일 뿐이다. 지원을 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오늘날 점차 이러한 주변 계급을 새로운 혁명의 주체로 호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렇다면 꼬리 칸 사람들은 주변 계급이고, 열차는 자본주의로 볼 수 있을까?


  3. 열차는 자본주의인가?

  영화를 아무리 관찰해도 열차 속 경제를 움직이는 생산 양식은 찾을 수 없다. 어떤 양식으로 생산이 이루어지는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수취 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분배되는지는 완전히 비어 있다. 그런데 이 생산 양식이라는 개념을 아예 배제해버리면 재밌는 접근이 가능하다. 즉, 어떤 생산 양식이든 상관없다는 접근이다.

  주변 계급은 자본주의만의 산물이 아니다. 역사에서 아예 잊힌 채로, 혹은 역사 속에서도 야만인이란 호명 아래 그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은 기존 세계의 생산 양식과 관련 없는 존재였다. '야만인'들은 때때로 더 많은 생산물을 위해 '세계'로의 공격을 시도했다. 세계는 때로는 그들을 진압하였고, 때로는 야만인들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물론 이는 결과론적이며 서구 중심적 사관임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생산 양식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면 오늘날 세계의 중심이 곧 서구라는 것 역시 우회할 수 없을 것이다.

  신분과 계급 역시 자본주의만의 현상은 아니다. 특히 영화에서는 <매트릭스>가 돌파하려 했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꼬리 칸에는 정해진 꼬리 칸의 역할이 있다는 메이슨의 말은 열차의 체계가 자본주의적 계급이 아닌 신분제에 훨씬 가까움을 말해준다. 열차의 세계를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바로 대입하는 데 무리가 있는 것은 여기에 기인한다.

<그림 1> 작중에서 캐릭터의 특성이 가장 확연히 살아있는 메이슨
소재에 비해 캐릭터가 아쉬운 작품이었기에 문득 객차마다 메이슨까지는 과하더라도 유치원 선생님 정도의 특색과 역할을 가진 인물들을 배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캐릭터는 마거릿 대처를 비유했음이 명백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과 연설에서는 대처가 그렇게 강조했던 자수성가를 위한 노력, 즉 자유주의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한 단서이다.

  작중에서 발견되는 모든 요소가 한계를 갖고 있는 것은 역으로 그것이 모든 시대를 포괄할 수 있기 위해서라는 접근도 가능하다. 윌포드로 표현되는 체제의 정점은, 작중 공백을 공백으로 둔다면 자본주의의 계급 독재로도, 제국주의의 독점자본으로도, 소비에트 체제의 스탈린으로도, 나치 독일의 히틀러로도, 절대주의의 왕으로도, 암흑시대의 신으로도 대치와 상상이 가능하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생산 양식을 배제하고서도 이 모든 사고를 적용할 수 있다. 열차의 양식이 노예제라고 생각하더라도, 봉건제라고 대입하더라도, 자본주의라고 대치하더라도, 심지어 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라고 여기더라도 모두 어느 정도는 맞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래도 우리가 당장 살고 있는 자본주의라고도 느껴지는 것이고. 가장 단순하게 읽는다면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지금 당장 우리가 무엇인지 모를 그 무언가일 것이다.

  열차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지칭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열차는 체제 그 자체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체제인지는 은유의 핵심과는 관련이 없고, 또 찾아낼 수도 없다. 여기서 남궁민수의 혁명은 우리가 지칭하는 체제의 핵심을 관통한다. "이게 말이지, 원래 그냥 문이거든. 근데 안 열고 계속 그 자리에 있으니까 벽처럼 생각하는데, 이것도 그냥 문이야. 문이거든." 열차의 은유는 모든 체제를 아우르며 시대를 초월해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전제, 바로 신분 사회라는 것이다.

  벽이 폭파되고 기차가 전복되어 사람들이 죽은 것은 이러한 체제의 보편에서 어긋난 문명의 최후를 나타낸다. 스스로 어긋나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얼어붙어 빙상이 되었고, 체제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체제 자체를 뒤엎었을 때 사회는(객실은) 극도의 혼란을 맞게 된다(전복된다). 열차 밖이 은유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신분 체제의 외곽이다. 굳이 예를 만들자면 교수와 청소부가 평등한 세상, 사장과 직원이 평등한 세상, 혹은 그 이상의 상상하지 못한 유토피아일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이 굳이 새롭게 은유된 아담과 이브로 끝나는 것은 이렇듯 유토피아를 지향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사고와 경험을 태초로 돌릴 필요가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demo.egloos
@Demagogy


덧글

  • 2013/11/08 10:58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리쫑오알지 2015/01/21 13:58 # 삭제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열차로 은유된 자본주의를 보면서 영화를 보는내내 즐거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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